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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설정이 부족한 캐릭터를 각색했으며, 약간의 드림요소가 있음을 알립니다.)

라스트 댄스

긍정C

  4년 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물론 나와 당신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다.

  평소와 다름없이 우드버리를 찾았다. 사시사철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는 이 마을은, 오늘도 전 세계가 성탄절을 앞두고 들떠있든 말든 상관없다는 양 우중충한 날씨다. 하기야 당연한 풍경이다. 대도시에서의 성공을 꿈꾸며 배에 몸을 실었다가 처참히 깨지고 찌그러졌을 청춘들, 치열한 경쟁에 지쳐 주저앉아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나 모이는 빈민촌이 아닌가. 매일 아침 실없는 두근거림을 가슴에 품고 이곳을 찾아오는 내가 오히려 이상할 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쩌면 오늘, 이곳에서 당신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개지니까.
  시무룩한 분위기의 주택가를 지나치고 시장으로 향했다. 당연하다는 듯 손님은 아무도 없다. 깊숙한 골목으로 통하는 어귀에 약에 절어 쓰러진 건달이나 몇 있을 뿐. 엮여봐야 좋은 일 하나 없을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과일 가게에 갔다. 벌레 먹거나 물러터진 과일 중에서 그나마 상태가 괜찮은 사과를 집어 들고, 녹슨 프레임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가게 주인 프루셀에게 다가갔다. 오늘도 그는 마지막으로 세탁한 게 언제 즈음일지 궁금한 퍼티그 팬츠와 목이 가슴팍까지 늘어진 회색 맨투맨 셔츠 차림이다. 눈매가 나빠서 그렇지, 말끔하게만 하고 다니면 꽤 나쁘지 않을 텐데.
  "아저씨! 사과 하나 계산해주세요!"
  "어헉?! 아, 나으리 오셨습니까!"
  어깨를 잡아 가볍게 흔들며 깨우자 프루셀이 괴상한 비명과 함께 일어나더니, 금방 비굴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반겨왔다. 그는 그 표정이 고객을 대하는 친절한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프루셀과는 알고 지낸 지 2년 남짓 다 되어가지만, 그가 나를 보고 자꾸만 나으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직도 짐작할 수 없다. 힘도 책임도 없는 일개 말단 직원일 뿐인데 말이다. 외투 앞주머니에서 동화 두 닢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터져 나오는 과즙의 단맛에 절로 안면 근육이 풀어졌다.
  "맛있죠, 나으리? 원래 맛있는 과일에 벌레가 꼬이는 법이거든요. 이 파리들 좀 보세요! 차암, 나름 엄선한 과일들인데 사람들이 외견만 보고 피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요."
  걸고넘어질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알아들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잠자코 우물우물 사과를 씹었다. 애초에 조언을 듣고 뭔가를 고칠 사람이었다면 옷 좀 깔끔히 입고 다니라는 충고에 자기는 사내아이만 둘이나 딸린 애 아빠라며 쑥스러워 하지 않았을 테다.
  "아저씨, 어제 하루 동안 동네에 별일 없었나요? 뭐 수상한 사람이 얼쩡댔다거나..."
  "아유, 물론입죠 나으리! 덕분에 나으리 말고는 개미 새끼 하나 얼씬대지 않았습니다요! 아, 간밤에 제타 녀석이 옆집 건달이랑 투닥대다가 홧김에 칼부림을 부려서 살짝 소동이 있긴 했습니다마는, 그거야 이 동네 양아치들한테 늘상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즛즛, 이젠 마피아 놈들한테 빌붙어 살 수 없다는 걸 좀 깨달았음 좋겠는데 말이죠..."
  프루셀의 말을 흘려들으며 코딱지만 한 할렘가를 둘러봤다. 이방인이라고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는 더러운 야생동물 몇 마리가 전부다. 그렇구나, 오늘도 당신에 대한 단서는 아무런 것도 찾아내지 못하는구나. 우울한 생각에 나도 모르게 낯빛이 어두워졌나 보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프루셀이 돌연 진지한 표정을 하고서는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으리, 제가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예? 아, 네. 말씀하세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으리를 봐오면서 든 생각입니다만, 이따금씩 나으리께서는 정말 이 비루한 동네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고 싶어 하시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요. 방금도 나으리 외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말씀드리니 안색이 나빠지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설마 프루셀에게 정곡을 찔릴 줄 몰랐다.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던 그는 이제 확신에 찬 눈빛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나으리..."
  제아무리 이 상인과 오랜 시간 교류해왔다 해도 당신을 찾고 있음을 들키면 곤란하다.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대책이 서지 않아 그저 침만 꼴깍 삼키며 그를 바라봤다. 
  "역시 나으리께서는 저를 좋아하시는 게... 아악!"

  오늘같이 구름 잔뜩 낀 잿빛 하늘이 퍽 우울한 날이었다. 상사의 연락을 기다리던 나는 커닝 인터스퀘어 후미진 곳에 위치한 단골 우동집에서 이른 저녁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날의 좋았던 일은, 인심 좋은 주인아주머니께서 성탄절 전야라며 튀김 우동에 새우튀김을 하나 더 서비스로 얹어주셨다는 것이었다. 정말 별일 아니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학자금 대출과 월세, 생활비만을 내는데도 금세 잔고가 바닥나는 데다가 성질 더럽고 성희롱까지 일삼는 상사 밑에서 시달리던 때였다. 울음을 참지 못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튀김 우동 앞에서 꺼이꺼이 울었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주방에서 나와 내 등을 두툼하고 따땃한 손으로 다독여주시며, 내년에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말씀해주신 게 아직도 기억난다. 이듬해 초에 망할 상사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의 허벅지를 더듬다 재기불능이 되고, 시에서 진행하던 청년 지원 사업의 수혜자가 되었던 데는 분명 아주머니의 축복 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빴던 일은, 그 가게의 뒷골목이 바로 흑성회가 애용하던 빠빠가루 암거래 장소였다는 것이다. 가게 밖에 위치한 화장실에 가던 나는 그만 검정 양복 차림에 선글라스를 쓴 남자들이 수트케이스를 주고받는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정장 라펠에 꽂혀있는 별 모양의 은뱃지가, 그들이 시시한 불량배 따위가 아닌 마피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나는 그만 얼어버렸다. 머리보다 몸이 앞서 뒷걸음질을 치다 그만 깡통을 밟고 말았다. 프로였던 녀석들은 자신들의 은밀한 거래를 목격한 불청객이 누구인지 확인하자마자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탕! 탕! 귀가 찢어질 듯한 파열음에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복부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황급히 골목을 빠져나왔다. 상대가 둘이니 가게에 들어가 농성을 벌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창 너머로 보이던 아주머니가 싸늘한 얼굴로 찬장에서 피스톨을 꺼내는 모습에, 방향을 바꿔 대로변으로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젠장, 손님 하나 없는 가게가 여태껏 망하지 않은 이유를 진작에 의심했어야 했는데!
  도처에 놈들의 동료가 깔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으슥한 곳에 숨으려 하면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살기가 느껴졌다. 병원 같은 곳에 들어가도 응급실에 들이닥쳐 가슴에 총알 몇 방을 박아넣고 돌아갈 녀석들이었다. 직장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마땅한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녀석들은 인적이 붐비는 장소에서까지 무턱대고 총질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드라이클리닝을 맡긴 지 얼마 안 된 와이셔츠는 점점 시뻘겋게 물들었고, 골두스 은행 건물이 시야에 크게 들어올수록 시야는 자꾸만 뿌예져 갔다.
  커닝시티 도심까지 두 정거장 거리의 빈민촌까지 이르렀을 때, 그만 빙판길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하이에나 같은 들개들이 득시글거리는데 비해 사람은 찾아올 일 없는 공터였다. 이를 악물고 팔다리에 힘을 줬으나 좀처럼 일어설 수 없었다.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해볼까 했지만, 내 허벅지까지 올 만한 잡초가 누렇게 마른 공터 근처의 건물에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검은 양복들은 아직까지도 나를 찾고 있을 테고, 어느 순간 내리기 시작한 눈은 자꾸만 펑펑 오는데 눈은 자꾸만 감겨왔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장수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꽃다운 나이에 비명횡사할 줄은 몰랐는데.
  아까 전부터 나를 바라보며 자꾸만 입맛을 다시던 들개가 별안간 위를 올려다보며 사납게 짖어댔다. 겨우겨우 고개를 돌리니 평생 열릴 일 없어 보였던 철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그 앞에는 내 얼굴까지 비쳐 보일 것처럼 광을 낸 구둣발이 있었다. 빤히 서 있던 구둣발의 주인은 별안간 한쪽 무릎을 굽혀 앉더니, 한쪽 팔로는 내 등을, 다른 한쪽 팔로는 내 정강이를 받치고 나를 안아 들었다. 생사부지의 순간에 경험한 인생 첫 공주님 안기였다. 적잖은 시간 동안 단련했을 단단한 팔과 넓은 가슴에 몸을 맡기고 있는 것이 꽤나 기분 좋았다. 노곤한 표정으로 나의 구원자를 올려다보았다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내려다보는 그 얼굴을 보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아, 그러니까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거구나. 성냥팔이 소녀가 추위에 떨며 성냥불을 지펴 할머니와 만나던 것과 같은 현상이구나. 그래서 십수 년 전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주고 떠났던 당신이, 이번에는 구원자로서 나타나 나를 안아 들고 있는 것이구나.
  혼곤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복부에 칭칭 감긴 붕대를 보고서야 그 일련의 사건이 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마치 모든 일이 꿈이었다는 듯 철물은 다시 굳게 잠겨 있었고, 건물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나타나 내 삶을 뒤흔든 당신은, 이번에도 아무런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나는 그런 당신의 그림자를 좇기 위해 매일 아침 우드버리로 향하기 시작했다.

  조각난 내 인생은 문자열로 이루어져 있다. 고아원 아이라는 이유로 괴롭힘당했던 초등학생 시절. 훌쩍이던 꼬맹이 앉아 무슨 일이냐며 다정히 묻더니, 상냥하게 주먹 쓰는 법을 가르쳐줬던 아저씨. 아무것도 없으면 불의에 대한 저항이 도리어 악행이 됨을 깨달은 아홉 살. 공부. 공부. 그리고 또 공부. 어렵게 들어간 대학, 자신과 같은 아이를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간 직장. 만연한 부패에 좌절한 사회 초년생.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무채색의 겨울날. 죽음의 벼랑에서 다시 만난 그 사람, 그리고 십수 년 만에 돌아온 형형색색의 색깔들.

  "그래서, 그게 크리스마스이브 저녁 날 이런 데서 술이나 마시고 있는 이유야, 자기?"
  60년 전에나 먹혔을 법한 바니걸 복장의 마담이 귀엽다는 듯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것 같은 냉 맥주를 한껏 들이키고는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만날 사람도 없고 돈도 없는 내가 이브 저녁에 어디 프루셀과 데이트라도 하겠나, 아니면 중심가에서 플렉스라도 하겠나. 1년 전 당신을 찾아다니다 얼떨결에 발견한 오락실ㅡ분명 업종은 오락실이지만 주류란 주류는 전부 다 취급하는 데다가 게임기 종류를 보면 빼도 박도 못 하는 불법 업소이나 어째 단속에 걸리지 않는ㅡ에서 시간이나 때우는 수밖에. 주인장인 바니걸 차림의 마담은 프루셀보다 훨씬 능청스러웠고, 우동집 아주머니보다 속내를 읽기 어려웠다. 그런 그녀는 결코 그 어떤 정보도 누설하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지만, 나는 마담이 좋았다. 무엇을 말하고 질문해도 그저 어른스러운 미소만을 되돌려주니까.
  "자기는 참 로멘시스트 같아."
  "추흡! 로멘시스트요? 제가요?"
  냉 맥주를 다시 한 모금 들이키다가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음악 소리와 두런두런 떠드는 소리에 묻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떠올리기만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그런 사람을 몇 년째 찾고 있잖아? 이 동네에서 돈 몇 푼 쓰면 누가 어디서 뭐 하는지쯤이야 금방 찾아낼 텐데, 그러지도 않고 말이야. 참, 헤네시스의 음유시인들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사랑꾼이야. 자기."
  로멘시스트? 사랑꾼? 내가, 그를?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웠다. 여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자니 정수리에서 김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마담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자꾸만 웃었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원한다면 내가 괜찮은 정보통을 연결해줄 수도 있는데, 어때? 나한테 이런 정보 얻는 거 쉬운 일 아니다?"
  마담이 자신의 몸을 내게 더 밀착해오며 말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오는 진한 장미 향에 정신이 아찔했다. 다분한 의도를 품고 마담에게 접근해오는 사람도 많은 만큼, 그의 제안은 결코 빈말이 아닐 테다. 하지만 당신을 그런 방법으로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조금도 없었다.
  "아니요, 됐어요.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자기라면 왠지 그렇게 대답할 것 같았어."

  오후 10시 55분의 우드버리는 이제 불쾌한 정적으로 가라앉아 있다. 온종일 거리를 서성이던 양아치들도 추워서 집에 들어간 것인지, 이 시간대에는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올 한 해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택시 정류장에 앉아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고 다리를 쭉 뻗으며 공터를 내려다보았다. 오늘도 당신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장소에는 아무도 없었다. 검정 바바리코트에 중절모를 쓰고 새빨간 목도리를 두른 사내 말고는.
  누군가 있었다. 그것도 굳게 잠긴 철문 앞에. 그 누구도 눈을 치울 생각을 않는 통에 새하얘진 공터 한가운데에, 시꺼먼 옷을 입고서. 마치 암실 한가운데에 방치된 흰 토끼처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아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가슴이 너무 쿵쾅거려서 수십 미처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남자가 들을 것만 같았다. 이것은 기회였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 그는 마침내 나를 구원하러 온 루돌프다. 빨간 내복 차림의 흰 수염 할아버지에게 데려다줄.
  숨죽여 그의 등 뒤에 다가갔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무릎까지 쌓인 눈이 발소리를 지워줬다. 남자가 청록색 녹이 슨 철문 앞에 서서는 감상에 잠겨 있기에 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사내의 등 뒤에 서고서야 마침내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홀스터에서 리볼버를 뽑아 사내에 목에 대고 공이를 당겼다.
  "소리 지르지 마. 허튼짓하면 쏜다. 흑성회 제2 간부 자베스, 웨이 홍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

  다른 간부가 아닌 자베스와 맞닥뜨려 다행이다. 그는 다년간 수집해온 정보대로 겁쟁이에 꾀를 부릴 줄 모르는 사내였다. 마음만 먹으면 나를 저 멀리 집어던질 수 있을 거구 주제에 벌벌 떨면서 자신들의 아지트로 안내해줬다. 흑성회의 새 은신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설마 도시 한복판에 있는 빌딩이 마피아의 본거지였다니. 기껏해야 개발단지의 지하 으슥한 곳에나 숨어들었겠거니 짐작했는데 완전히 헛짚었다.
  골두스 은행 본사와 맞먹을 만큼 거대한 블랙 오닉스 타워의 내부는, 벽면의 대부분을 덮은 통유리가 선팅 처리되어 있는 데다가 이마저도 극장에서나 볼 법한 와인 빛 벨벳 커튼이 쳐져 있어 매우 어두웠다. 띄엄띄엄 설치돼 있는 간접 조명은 산뜻함보다는 퇴폐적인 분위기만 배가할 뿐이었다. 홀에 모여있는 조직원들은 무기를 손질하거나 책을 읽는 등 제각기 할 일을 하는 듯했으나, 언제든 그 손에 들린 단도를 투척할 준비가 되어있는 듯했다. 할 테면 해보라지, 그 전에 동료의 목구멍에 숨구멍부터 뚫릴 테니. 자베스의 목에 총구를 거칠게 밀어붙이며 말했다.
  "전부 비켜. 너희들이 아니라 웨이 홍을 만나러 왔다."

  클럽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의 복도와 달리, 당신이 있는 사무실은 고딕풍으로 인테리어 되어 있어 마치 중세시대의 교회를 연상시켰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반사된 불빛은 자못 성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었으나, 그 아래서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당신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마 위로 올린, 원래의 검정 색이 적잖이 남아 있는 백발의 머리는 분명 깔끔히 정리했음에도 댄디하다는 인상을 주지 못했다. 큰 키와 다부진 체격, 그리고 날카롭게 치켜뜬 커다란 눈으로 인해 마치 호랑이와 같은 아우라를 풍겼다. 부하가 붙잡혀 있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여유롭게 내려다보는 당신과 그런 당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나의 모습은,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내가 당신에게 협박당해 끌려왔다고 착각할 만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파이프 담배를 책상 위에 올려둔 당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베스. 이 시간에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경찰 따위한테 붙잡힌 거지?"
  당신은 여전히 톱날 같은 이를 드러낸 채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그 목소리는 듣는 이가 자신에게 겨눠진 총도 잠시 잊게 만들 만큼 날카로웠다. 자베스는 내가 처음 리볼버를 들이댔을 때보다 더욱 소스라치게 놀라,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보스와 함께 우드버리에서 지냈던 시절이 떠, 떠, 떠올라서 추억여행 겸...! 죄송합니다 보스!"
  자베스의 말에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당신은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 녀석은 그만 놔줘라. 어차피 내게 볼일이 있어 찾아온 게 아닌가?"
  나는 말 없이 자베스를 옆으로 밀치고 당신에게 총을 겨눴다.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기라도 했다간 곧바로 발포하겠다는 말과 함께.

  "저승으로 보내주기 전에 몇 가지 묻겠다. 4년 전 크리스마스 때, 너는 우드버리에서 총상을 입고 죽어가던 경찰을 구한 적이 있다. 그 이유가 뭐지?"
  "우리 조직은 커닝시티를 본거지로 활동하는 만큼 경찰과의 관계 유지가 필수적이었다. 멋 모르는 귀여운 꼬맹이한테 은혜 좀 입힌다고 해서 나쁠 거 없지. 최대한 적을 줄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후후..."
  귀여워? 내가?! 터무니없는 말에 하마터면 그만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질문을 이어갔다.
  "우드버리에서 여경을 구해준 뒤, 너희 조직은 갑작스레 아지트를 옮겼다. 흑성회의 주 수입원으로 예상되었던 빠빠가루 밀매까지 포기해가며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지."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음에도, 당신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말을 끊었다.
  "그런 것을 질문이라고 하는 거냐? 빠빠가루 밀매는 우리 조직의 사업을 확장하는 발판 중 하나였을 뿐이다. 흑성회가 영원히 어두운 지하에서 웅크리고 있을 거라 여긴 거냐?"
  자신감에 가득 찬 웃음이 그야말로 당신다웠다. 그 많은 흑성회 조직원들이 당신을 따르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끝을 모르는 야망 때문에 내 인생은 송두리째 무너졌다. 그런 끝을 모르는 야망 때문에 당신을 찾는 데까지 이렇게나 오래 걸리고 말았다. 
  "웨이 홍, 너의 야망으로 커닝시티 시민들의 삶은 나락까지 떨어졌다. 네놈이 발판으로 사용한 마약은 누군가를 재기불능의 중독자로, 고향까지 빼앗긴 노예로 만들었다!"
  가정 대신 조직을 택했던 얼굴 모를 부친, 홀로 가정을 감당할 수 없어 아이를 고아원에 놓고 도망친 모친. 약물에 절여져 원아들을 개만도 못하게 굴렸단 고아원장. 검은돈을 받고서는 흑성회가 연루된 모든 사건을 유야무야하던 상관들. 내 인생의 반의 반은 그야말로 당신으로서 유린당했다.

  "...풉, 푸흡! 푸하하하하하!"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거나 하는 그림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내가 정말 당신을 죽이러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혹스러워하거나 분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이 상황이 너무 우습고 한편으로 즐거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다니.
  "애송이 녀석이라고는 생각했다만, 설마 이렇게까지 천진난만할 줄은 몰랐군. 과연 전해 듣던 대로 로맨시스트구나."
  당신의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내 몸은 그대로 경직되어 버렸다. 듣던 대로 로맨시스트라고? 항상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마담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 때문에 주민들이 마약에 중독됐다고? 흑성회가 마약 밀매에 뛰어들기 전부터 빠빠가루는 이미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노예가 되었다고? 녀석들은 빌리고 빌려서 더 이상 손을 뻗을 데가 없어, 더러운 돈까지 눈독 들인 쓰레기들이다. 그런 놈들에게 스스로 일해서 돈을 갚을 기회까지 제공했다. 그게 그렇게 빌어먹을 짓인가? 캐시 카탈리나가 원하고, 골두스 영감탱이가 원하고, 경찰청장이 원하는 일을 대신해 줬다. 우리는 돈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마모되고 사람으로서의 감정이 사라지는 무서움을 대신 짊어졌을 뿐이다!"
  웃으며 입을 열기 시작한 당신은 말을 마칠 때 즈음에는 마치 화난 듯이 소리쳤다. 기세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던 송곳니에 힘이 들어가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마치 나를 오래전부터 지켜봤다는 듯한 말, 나 같은 빈민가 출신을 위한 장학 사업을 벌이던 사업가들의 이름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아 정신이 아찔했다.
  "변명은 지옥에나 가서 해."
  어떻게든 동요하지 않는 양 쏘아붙였지만, 그만 총을 놓칠 것만 같아 당신으로부터 몇 걸음 물러났다. 당신은 그런 내게 달려들기는커녕 다시 평소의 웃는 얼굴로 돌아가, 책상 위 파이프 담배를 집어 들었다.
  "무엇보다도 너는 나를 쏘지 못해. 나를 사랑하고 있잖아?"
  "웃기지 마!"
  울그락붉으락해진 얼굴로 M60을 흔들며 소리쳤다. 귀 끝까지 잘 익은 홍시처럼 달아오른 것은 결코 그에 대한 연심이 들켜서가 아니다. 그저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는 게 싫었다. 우드버리의 어둠처럼, 내 유년기의 삶 앞의 길에는 가로등도 없이 깜깜했다. 안에서는 원장에게, 밖에서는 또래 아이들에게 멸시받는 나날 따위 아무런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할 점이 없었기에 사랑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미움을 넘어서, 누구를 원망하며 살아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꼬맹이였던 내게 주먹 쥐는 법을 알려줬던 아저씨가 흑성회의 보스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것이 운명임을 느꼈다. 이 끔찍한 동네의 작고 좁은 집들을 모두 불행으로 물들인 주범의 목숨을 그가 가르쳐준 방식으로써 거두어가는 것이야말로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만을 위해서 볼꼴 못 볼 꼴 다 봐가며 자는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했다. 정의 실현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매일 제복을 입었다. 아침마다 우드버리에 들려 단서를 좇았다. 끝내 당신을 찾았다. 당신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지금은 내 인생에 있어 최고의 순간이다. 그런데 당신을 죽여봤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당신을 향한 나의 마음이 연심이라는 끔찍한 이야기에 휘둘릴 수는 없다.
  나는, 끝내 방아쇠를 당겼다. 

  4년만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물론 나와 당신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상관 없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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