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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나

(@MS2_siyina)

 은 낙엽이 지고 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트라이아에는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겨울. 그와 비슷한 시기에 홀로 떨어진 곳에 있는 외딴 섬에도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아침해가 뜨는 것이 늦어지고 밤이 길어지는 계절.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그곳에 드물게 반가운 손님이 등장했다.

 "어서오거라."

 "다녀왔습니다!"

 다정히 인사하는 이를 향해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아이의 한 손에는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구긴 채로 붙들려온 이가 있었다. 연한 하늘빛을 연상시키는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묶은 이는 이제 되었으니 손을 놓으라며 신경질적으로 아이의 손을 뿌리쳤다. 그 행동이 익숙한 듯 아이는 하여튼 까칠하다니까. 하면서 투덜거리고는 제 스승에게로 달려갔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던 어느 날, 모험가로서 외부에 임무를 나가 있던 이슈라의 제자가 제 스승의 친우를 끌고 고향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

 "그래서 나는 대체 왜 데리고 온 거냐."

 "크리스마스는 다같이 즐겨야 좋잖아?"

 

 간식을 야무지게 입에 넣으며 태연하게 말하는 아이를 보며 그는 이마를 짚었다. 한 때 배신자로 이름을 날렸던 홀슈타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크리티아스에 있는 자신의 숙소에서 편히 쉬고 있었던 그에게 아이는 날벼락과 같았다.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칼리브 아일랜드 가자!" 하고 그대로 끌려온 그는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크리스마스네 뭐네 하는 소란은 자신과 먼 일이라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그래왔고, 그 생각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랬던 그에게 아이의 난입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다시금 한숨을 내쉬는 그를 향해 아이는 전혀 알 수 없다는 얼굴로—입가에는 간식으로 먹은 쿠키의 부스러기가 그대로 묻어있는 상태였다—그를 바라보았다. 같이 즐기면 좀 안 돼?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하는 것이 그대로 느껴지는 눈빛에 그 역시 아이와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마주보다, 결국 먼저 포기한 것은 아이 쪽이었다.

 

 “너는 대체 뭐가 매사에 그렇게 불만이야?!”

 

 “그러는 네 녀석은 대체 왜 날 끌고온 거지?”

 

 “스승님도 오랜만에 친우도 보시고 좋잖아!”

 

 “내 의사는?”

 

 “필요해?”

 

 “……”

 

 오로지 제 스승 위주로 생각하는 아이답게, 네 의견은 필요없다 말하는 아이를 보며 그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 오는 것인데 자신의 의견이 필요없다면 대체 누구의 의견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사라져버린 어이와 함께 아이를 바라보니 아이는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펴며 되려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는 이미 허락 받았어. 나도 사고만 막 치던 나이는 이미 지났다고.”

 

 누가 그래? 그 시절 그대로인데.

 

 그 생각을 그대로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아이도 느낀 것인지 내가 뭐! 하고 울컥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만. 하고 태연히 차를 마시는 그를 보며 한참을 노려보면서 그르릉거리던 아이는 결국 그대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어차피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어떻게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이의 말대로 친우인 이슈라가 그렇게 환하게 반겼다는 것은 이미 내부에서도 이야기가 끝난 일이라는 소리였기에 그는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 며칠이 지나, 크리스마스 당일. 칼리브 아일랜드는 드물게 들뜬 분위기였다.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아이가 전날 밤 제 스승과 함께 설치했던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있던 선물을 열어보고는 신난 것이 첫째일 것이며, 둘째로는 간만에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다며 들뜬 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들뜬 것은 아이였다.

 

 이슈라가 꼼꼼하게 챙겨준 목도리와 손모아 장갑까지 꼭 하고는 바깥에 나와서 눈을 맞으며 와! 하고 해변가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뒤를 이어 뛰지 말거라, 넘어지겠구나. 하며 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이슈라 역시 눈에 들어왔다. 근처를 지나는 룬 블레이더들은 다들 훈훈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다 지나갈 뿐이었다.

 

 홀슈타트는 헛웃음이 지어졌다. 아이를 향해 유치한 시기질투를 내보이던 것들이 누구들인데 이제와서 훈훈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저렇게 신난 아이의 기분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수도 없는 일이었으며, 아이는 지금 그 누구보다 가장 행복해보였기에 그럴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해변가에서 포다닥 뛰어오던 아이가 그들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

 

 “단장대리가 오늘 저녁에 파티한다던데!”

 

 “그 녀석… 여전히 일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군…”

 

 “하하, 이런 날에는 즐기기도 해야지.”

 

 여전히 일 벌리기는 좋아하는군. 하며 작게 중얼거리는 홀슈타트를 보며 이슈라는 작게 웃었다. 이런 날에는 가끔씩 놀아도 괜찮을테지. 그 말에 가장 신나는 것은 단연코 아이였으며, 그 기분을 너는 파티 전까지 수련하자며 훅 떨어트린 것은 이슈라였다.

 

 시트콤과 같은 그들의 모습에 슬쩍 웃으면서도 고향의 바다를 지그시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어쩌면 크리스마스라는 핑계로 고향에 올 수 있도록 해준 것이 아닐까, 하는 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선물은 다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 어쩌면 이렇게 가끔씩이라고 소식을 전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군. 그런 생각도 하며 그는 후, 하고 숨을 내뱉으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옅은 숨이 작고 하얀 구름이 되어 공중에 잠시 떠 있다가 그대로 공기중으로 사라졌다.

 

 

 요새의 안쪽, 평소라면 대회의실로 쓰였을 곳의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원형의 테이블 위에는 온갖 음식들이 놓여져 있었다. 모두가 한 조각씩 먹어도 남을 것만 같은 거대한 케이크를 중심으로 칼리브 아일랜드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숲에서 따온 채소들로 이루어진, 드레싱마저 직접 제작한 샐러드부터 바닷가에서 잡아올린 해산물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거대한 닭을 오븐에 노릇하게 구워내어 갈색빛을 띄고 있는 먹음직스러우면서도 섬에서는 사치스럽다 생각될 수 있는 것들까지 한가득이었다. 성인들을 위한 제대로 숙성된 붉은 와인과 아직 어린 아이를 위한 생과즙 오렌지 주스까지 섬에서는 절대 볼 수 없을 완벽한 차림이었다.

 아이는 파티의 음식들을 보고서는 신나서는 이게 다 뭐예요?! 하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아이의 눈에는 거대한 케이크가 가득 담긴 듯 보였다. 연한 분홍빛의 생크림으로 예쁘게 꾸며져 높은 층을 이룬 케이크는 딸기가 포인트를 주고 있었다. 가장 높은 층에는 쿠키처럼 보이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산타 모형이 있었다. 아이는 간만에 막내라는 것을 주변에 퐁퐁 분위기를 풍기며 설렘을 감출 수 없는 미소를 한가득 띠었다.

 

 “다들 한 잔 씩 받았지?”

 

 유페리아와 레잔의 도움으로 모두에게 붉은 와인을 돌리고 아이에게는 오렌지 주스를 쥐어주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예! 하고 답하는 소리가 들리자 렌듀비앙이 잔을 들어올렸다. 반을 채운 와인잔을 들어올리며 이번 한 해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라며 입을 열었다. 그 말에 모두가 침묵을 지켰다. 홀슈타트가 아라자드를 살해한 일로 인해 변절자로 낙인 찍혀 뒤를 쫓던 도중 블랙샤드에 침식되어버린 세 명의 핵심인원을 구해낸 아이. 그리고 여전히 최전방에서 홀로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을 아이. 모두의 시선이 아이로 향했다.

 “그러나!!”

 

 렌듀비앙 역시 아이를 잠시 바라보다, 언제나와 같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입에 걸쳤다. 렌듀비앙의 큰 소리와 함께 다시 모두의 시선이 렌듀비앙을 향했다.

 

 “모든 것은 해결되었고, 우리는 진실을 알았다. 그에 감사를 표하며, 모두에게 이번 한 해를 잘 견뎌주었다는 뜻에서 이번 파티를 준비했지.”

 

 수고했고, 고생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올해도 잘 버텨주었다!

 

 렌듀비앙의 말을 모두가 동시에 외쳤다. 메리 크리스마스! 언제 침묵을 지킨 이들이냐는 듯이 함성을 질렀다. 요새가 떠들석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이도 밝은 분위기가 마음에 든 것인지 배시시 웃으며 주스를 쭉 들이켰다. 그리고서는 쪼르르 렌듀비앙과 유페리아 곁으로 달려갔다.

 

 “단장대리, 단장대리. 저 쿠키 제가 먹을래요!”

 

 “옷, 우리 꼬맹이. 저거 가져오면 먹게 해줄게!”

 

 “애 그만 놀려요.”

 

 거칠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난치던 렌듀비앙은 결국 유페리아에게 등을 한 대 얻어맞고 나서야 얌전히 쿠키를 뽑아다 아이의 입에 물려주었다. 오도독, 하고 쿠키가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이 날아갔네! 하며 또 놀리던 그는 스승님한테 갈 거예요! 하고 가버리는 아이의 뒷모습을 아쉽게 바라봤다.

 

 아이는 입에는 크리스마스 트리 모양의 쿠키를 물고 한 손에는 주스가 담긴 잔을, 다른 손에는 산타 모양의 쿠키를 들고 다시 이슈라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근처에 있던 샐러드를 조금 덜어내어 먹던 그는 다가온 아이를 보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아이가 내민 쿠키를 보고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붉은 모자에 붉은 옷을 입은 산타 모양의 쿠키는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쿠키를 받아들고 모자 부분을 톡, 하고 가볍게 베어물었다. 고소한 쿠키의 향이 입안에 고루 퍼졌다.

 

 “맛있구나. 고맙다.”

 

 그 한 마디에도 아이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해맑게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렌듀비앙은 쟤네는 진짜 이상한 사제지간이라며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다시금 반복했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이슈라 님이 그럴리가 없잖아요. 하고 답한 것은 유페리아였다.

 

 렌듀비앙과 유페리아는 언제나 그랬듯, 붙어 있었다. 한 명의 잔이 빈 것 같으면 병을 가져와 서로 따라주기도 하며 손이 닿지 않을 법한 곳에 놓여있는 것은 가져다 주기도 했다. 멀직이서 바라보았을 때는 다정한 연인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렌듀비앙은 유페리아와 잠시 무언가 얘기하는 듯 하더니 케이크를 잘라내었다. 케이크는 각자 잘라 먹어라! 하고 외친 그는 자신이 잘라낸 조각을 접시에 덜어 유페리아에게 건네주었다.

 

 홀슈타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눈꼴시리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조용히 음식을 먹으며 와인을 홀짝이던 그에게 다가온 것은 이슈라였다. 네 제자는 어디에 두고 혼자 왔냐는 홀슈타트의 말에 이슈라는 슬쩍 시선을 옮기며 눈짓을 했다. 그곳에는 레잔과 함께 다른 룬 블레이더들 사이에 둘러쌓여 있는 아이가 있었다.

 

 “그래서 언제부터 준비한 거냐.”

 

 “무얼 말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군.”

 

 “말 장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슈라.”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는 그를 보며 이슈라는 작게 웃었다. 여전히 장난기도 귀염성도 없는 친우였다. 저런 성격으로는 아이와 같이 다녔다 하더라도 홀로 다니는 것이 편하다며 혼자 다니는 날이 더 많았겠지. 이슈라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 생각은 대체로 들어맞는 편이었다. 그렇게 오래 준비하진 않았다. 와인을 한 모금 홀짝이며 답하는 이슈라를 보며 홀슈타트는 다시 미간을 좁혔다.

 

 “정말 오래 준비하진 않았다. 고작해야 한 달 정도. 섬 바깥에서 크리스마스에 대해 듣고 온 모양인지 편지에 써서 보냈더군.”

 

 “그래서 냅다 나를 잡아오라고 한 건가?”

 

 “너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의견도 정리가 된 상태였으니까.”

 

 하하, 웃으며 답하는 이슈라를 보며 홀슈타트는 이마를 짚었다. 아이의 행동력이 좋은 것은 어쩌면 스승인 이슈라를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이슈라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다른 이들도, 현재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렌듀비앙마저 허락했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렌듀비앙은 오로지 재밌겠다는 이유로 허락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그래서 간만에 고향에 온 기분은 어떠했지?”

 

 “……나쁘진 않군.”

 

 “가끔은 와서 소식도 전하고 해라.”

 

 “번거롭게.”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차며 불편하다는 티를 내는 그라도 말을 해두면 제대로 해줄 것임을 알고 있는 이슈라였기에 마음놓고 웃을 수 있었다. 문득 시산을 돌렸을 때 아이는 어느새 손에 케이크 한 조각이 올려진 접시를 들고 다른 이들과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로 바깥의 이야기일 것이었다.

 

홀슈타트는 다시 와인을 홀짝였다. 입 안에 부드러운 향이 잔잔히 퍼졌다. 고요한 수면에 물방울이 하나 떨어지는 정도의 파열이 일었으나 그것은 결국 그를 움직이게 만들 것이었다. 눈이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그들에게 하나의 선물이 아무도 모르게 도착한 날. 그들에게 가족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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